불가능한 동일시의 한 경우: 예술가가 된다는 것 – 진은영

진은영 (시인)

                                           

  김동령과 박경태의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기지촌 여성들과 기지촌에서 태어난 혼혈인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이 젊은 감독들은 처음에는 자원봉사의 형식으로 현장의 시민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김동령은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여성인권단체에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기지촌 여성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사회학도였던 박경태 역시 기지촌 아이들에 대해 기록하는 일을 하러 현장에 들어갔다가 영화작업을 하게 되었다. <경기 고스팅> 대담에서 김동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연히 그런 현장을 보게 됐고 일을 하게 됐고 시간이 지나며 당연히 이걸 영화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서 영화를 만들게 됐던 건데 저희가 지난 궤적을 보면 현장활동가라는 정체성을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던 거 같아요.”(김동령, 「대담」) 두 사람에게 현장활동가가 아닌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감독들이 활동가이면서 예술가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천사처럼 현장으로 날아와 고통 받는 자들의 삶을 구원할 계몽의 메시지를 고지하고 그들을 치유한다. 그리고 그 가엾은 자들이 구원되는 모습을 기록하고 그렇게 구원되기까지 그들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전한다. 흰 날개 대신 카메라의 투명한 시선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고통스러운 공간을 날아다니는 예술의 거룩한 천사라니, 결코 나쁘지 않다. 그런데 김동령과 박경태는 왜 수호천사-되기에 회의를 느꼈을까?

  그들은 천사 역할에 싫증이 난 것처럼 보인다. 천사란 결국 하느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한 존재가 아닌가! 천사는 인간의 일에 자유롭게 개입할 수 없으며 인간과 관계 맺을 수도 없다. 인간과 사랑에 빠진 타락 천사는 하늘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헐리웃의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서도 잘 알려져 있다. 천사는 환한 별빛이나 부드러운 음성을 통해 그저 세상에 계시를 전하는 존재이다. 천사가 그가 지키는 사람과 사랑이나 우정을 나누고 그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슬퍼하며 가끔 멀리 도망치기까지 한다면, 그건 매우 곤란한 일이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은 어리석은 천사처럼 굴어선 안 된다.

  천사angel라는 말은 메신저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앙겔로스angelos에서 나왔으니, 바람직한 천사는 신과 인간 사이의 메신저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미셸 세르, 「천사들의 전설」, 15쪽) 그렇다면 감독-천사는 영상 속에서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 성매매 여성들의 고통받는 현실과 “성매매 근절/치유라는 도덕적 교훈”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기지촌 여성들도 이러한 재현의 윤리를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삶을 조금은 비참하게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연기를 한다.(박경태, 「재현과 영화적 윤리」) 이런 방식으로 랑시에르가 재현의 체제라고 불렀던 예술체제에 속하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아리스토렐레스가 󰡔시학󰡕에서 언급한 미메시스로서의 예술로 대표되는 이 체제에서 재현이란 “의미작용들의 질서 정연한 전개이며, 파악된 것 혹은 예측된 것과 불시에 닥치는 것 사이의 조정된 관계”이다.(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205쪽) 두 영화감독이 기지촌이라는 공간에서 예측되는 도덕적 의미작용들의 질서정연한 전개를 민감하게 감지한다. 그로부터 그들은 성매매 근절이라는 규범의 전개를 위해 자신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사태 자체를, 혹은 불시에 닥치는 것을 성실하게 조정해야 하며, 이와 같은 조정작용 속에서 매번 작품 속에서 동일한 주체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대체로 착한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매매춘 여성은 가련하고 무력한 피해자이다. 이런 식의 피해자 표상은 가련한 주체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킴으로써 바람직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착한 영화는 시민단체가 사회나 정부로부터 더 많은 기부금이나 지원금을 받고 그것으로 피해자들을 돕는 활동을 지속시키는 데 유리하다. 그런데 김동령과 박경태는 착한 영화의 재현과정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하는 듯하다. ‘우리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등장하는 주체는 늘 무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얌전하고 순진한 사람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영화의 제작 과정이 기지촌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에 대한 사회적 표상에 자기 동일시를 수행하게 하는 과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젊은 예술가의 당당한 예술적 출사표인가? 그들은 철저한 예술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반-재현적 다큐멘터리 영화를 새로이 제안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박경태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현실의 고통을 설파하는 신파를 믿지 않으며, 어떤 목적이든 스펙타클을 위한 재연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터놓고 연기를 그냥 해보자는 방향으로 재현방식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주인공들과 서로 의논하여 미장센을 만들고, 미장센 속에서 실험관찰을 하기보다는 개입하여 적극적으로 장면을 같이 연출하는 것입니다. 서로 갈등하고 싸우면서…”(박경태, 앞의 글)   

  감독들이 이러한 선언을 하게 된 것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받았던 예술적 도제수업의 영향 때문은 아니다. 에세이와 작업일지를 살펴보면 그들이 현장에 와서 새로운 재현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의 작업에서 두 사람은 작업에 침입해 들어오는 귀찮은 피사체들을 경험한다. 박경태 감독이 찍은 영화의 주인공 혼혈인 박명수가 바로 그런 피사체였다. 감독은 대상과 거리를 두고 카메라의 원근법적인 초점거리를 유지하려고 한다. 카메라는 한 사람의 선행과 악행을 조용히 관찰하는 천사처럼 피사체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이 피사체는 천사를 발견하고는 놀라거나 감탄하고 신에게 제 사정을 전해주기를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박명수는) 언제나 카메라 바로 앞에서 저에게 쏟아내듯 말을 걸어왔습니다. 카메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저는 그의 모습을 안정적인 초점거리에서 담기 위해 매번 뒷걸음치며 노력했지만 그의 직설적인 태도 앞에서 실패하곤 했고 어떤 말이든 대화를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와 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박경태, 「미래로 보낸 편지」) 천사와 선인(혹은 악인)은 우정을 나누든지 불화하든지 진짜 관계라는 것을 맺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감독은 깨닫는다. 그러한 깨달음이 도래할 때 카메라의 천사는 데면데면하게 구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유사한 실패는 김동령의 작업일지에서도 발견된다. 동두천 미군클럽에서 일하는 러시아 여성 마리아를 촬영하기 위해 감독의 카메라는 1년 넘게 반복되는 그녀의 단순하고 시시한 일상만 찍고 있었다. 어느 날 마리아가 미군에게 심하게 맞고 돌아오는 일이 발생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따끈따끈한 사건’이었고 다큐멘터리에서 ‘한 방’을 건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늘 자의식이 강해 카메라를 의식하던 마리아는 이 순간만은 자신의 고통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어 내가 카메라를 든다고 해도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마리아의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나는 속으로 호재를 부르며 이성적으로는 이미 소파에 손을 뻗어 카메라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몸은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김동령, 「아메리칸 앨리 작업일지」) 카메라 앞에서 자의식이 매우 강한 이 피사체를 찍기에 가장 좋은 순간에 감독은 망설인다. 카메라를 들이댄다고 이 상황을 제대로 찍을 수 있을까, 이것을 찍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주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을 하다가 결국 김동령은 카메라를 소파에 던져두고, 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을 한 채 피 흘리는 팔을 감싸 쥐고 있는 마리아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마리아의 팔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 상처를 지혈한다. 그리고 나서 불법체류자인 그녀를 잡으러 올지도 모를 경찰을 피해 집안의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가서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는 마리아 곁에 가만히 앉는다.

  이것은 더 진전된 예술적 작업을 위한 과정인가? 그러니까, 기지촌의 러시아 여성은 드디어 마음을 열고 두 사람은 우정을 확인하기에 이르며, 그후 감독은 순조롭게 촬영을 마치고 가장 리얼하고 멋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완성했다는 일종의 예술적 미담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감독은 돌아와 일주일간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를 하고 ‘앞으로 결정적인 순간이 또 나타날 테니 기다리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러나 감독의 작업일지에 따르면 “그 후 다큐멘터리를 찍는 2년여 동안 그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자존심을 회복한 마리아가 그런 상황에서 촬영을 허락하는 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김동령, 앞의 글)

  그렇지만 다른 종류의 진전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지촌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면서 두 감독은 ‘결정적인 순간을 전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질문한다. 매일의 비참함과 매일의 고통을 전하고 알리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결정된 세계의 비참한 하늘 위에 카메라를 메고 떠있는 것 말고 우리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이 새로운 의문은 이들이 최근 영화 <거미의 땅>에서 결정적 한방 대신 다른 것을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가져오도록 만든다. 감독은 카메라의 초점거리를 무시하고 들어오는 피사체를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이제 감독이 확보하려는 초점거리 안으로의 침입은 침입이 아니라 초대의 성격을 띠게 된다. 감독들은 기지촌 사람들에게 자신의 불행했던 혹은 불행할 예정인 삶에 대한 실증적 증언 대신 영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신의 자기 재현 방식을 제안할 것을 요청한다. 등장인물들은 영화에 중요한 모티브가 될 만한 시를 써오고 자신의 환상을 영화의 한 장면으로 구성해줄 것을 제안하면서 촬영의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한다.

  이제 영화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실증적 태도에서는 어쩌면 필요하지 않았던 비명소리나 중얼거림, 꾸며낸 환상들처럼 진실이 아닌 것 같은 말들”이 중요하게 되었고 영화의 계몽적 성격은 확실히 사라지게 되었다. 피사체였던 세 주인공 여성들에게 “카메라 뒤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며 정확하게 누가 어떻게 어떤 의도로 보는지 설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고)… 철저히 협업적 맥락에서 연출과 상연을 함께 고민”한다. 따라서 피사체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을 어떻게 드러낼지에 대해 고심하고 자신의 의도된 즉흥성에 따라 상황을 표현한다. 가령 주인공 여성은 미군에게 호객행위를 하던 골목길을 걷고 또 걸으며 자신의 느낌을 전달한다. 촬영은 그녀들의 걸음걸이와 몸짓이 그녀들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같은 작업은 자신들이 체험한 불행한 사실들의 전달과 고백이 아니다. 그녀들은 랑시에르가 말한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 비동일시)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표현은 그들이 체험한 것과 무관하지 않지만 체험의 전달은 아니다. 우리에게 체험으로 ‘보이는’ 것은 말에 종속된다. “말[하기]의 본질은 보이게 만드는 것이며, 볼 수 있는 것을 질서정연하게 하는 것이다.”(랑시에르, 앞의 책, 203쪽) 즉 체험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볼 수 있게 질서화하는 것이다. 호객행위를 하는 기지촌 여성들은 거리를 누비지만 그 순간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음미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들은 이전에 거닐었던 거리에서 자신들이 지금 느끼는 다양한 정서와 심리 상태에 대해 표현하려고 한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의 ‘영화언어적 표현’을 통해 이전의 체험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가시화하는 주체가 된다. 자신들에게 지정된 사회적 표상에서 벗어나 비동일시의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따뜻한 연대와 우정의 사건들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 출연한 기지촌 여성들은 개인적 곤란이 닥쳤을 때 돈을 요구하거나 영화의 저작권과 관련된 협박을 하기도 한다. 과거에 이들이 애절한 눈빛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이다.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그 고통의 현실을 알린다는 선한 의도로 그 공간에 들어가고 또 그들과 연대했던 젊은 감독들에게는 모종의 배신감과 환멸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은망덕에는 매혹적인 요소가 있다. 영화작업에서 자신의 느낌을 스스로 표현하고 의견을 제안하는 일련의 자기교육적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은 영화배우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돈을 요구하고 저작권 문제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이 배우들에게는 이제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새로이 구성된 정체성의 수행이다.

  몫을 갖지 못했던 이들이 몫을 요구한다는 것은 새로운 가능성의 시작이다. 물론 이러한 수행은 감독과 기지촌 여성들의 우정 어린 연대를 결렬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결렬과 파기가 가능하다는 것은 우정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다. 니체가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너는 노예인가? 그렇다면 벗이 될 수 없다. 너는 폭군인가? 그렇다면 벗을 사귈 수 없다.”(정동호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95쪽, 2003) 우리가 감독과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서 벌어진 배반과 불화의 사건이라고 명명한 것은 일방적으로 따르고 일방적으로 주도하고 통제하는 관계의 파열이다. 그것은 고통스럽지만 희망적인 것이다.

  성매매 여성에서 영화배우-되기라는 비동일시의 활동은 랑시에르가 말한 불가능한 동일시이다. “동일시를 통해서 이제 막 탄생하려는 주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동일시 자체의 불가능성. 이 세 번째의 불가능성은 동일시의 언어적 역설에서 기인한다. 왜냐하면 동일시란 언제나 무엇과의 동일시이므로 그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 한 동일시는 불가능한 동일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301쪽) 그런데 이러한 불가능한 동일시는 기지촌 여성들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젊은 영화감독이 동두천과 파주의 기지촌에 들어가서 느꼈던 곤혹감은 불가능한 동일시에서 발생하는 기분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김동령은 작업일지에서 자기를 기지촌 여성들에게 동일시하는 일이 불가능했음을 고백한다. 동두천의 클럽골목을 거닐면서 미군들이 추파를 던질 때 김동령은 “계급적으로는 너희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곳에서 왔지만, 너희들이 보내는 성적 추파만큼은 재량껏 받아줄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에 우월감을 느”낀다. 그녀는 미군의 절대적 약자로 존재하는 여성들의 처지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녀는 “기지촌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을 보고” 가는 “다양한 학자, 예술가, 정치인, 종교인들”과 자기를 동일시할 수도 없다.(김동령, 앞의 글) 동일시의 이러한 두 가지 불가능성 속에서 기존의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 그러니까 기지촌 여성-되기의 사건이 발생한다. 감독들이 동일시하려는 기지촌-여성은 지금까지 존재한 적 없는 여성이다. 사회적으로 호명된 기지촌 여성은 영화적 언어 속에서 자율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적 주체일 수 없다. 그러나 감독들과 여성들의 예술적 공동작업을 통해서 감독들은 지금 막 탄생하려는 기지촌 여성 주체와 자기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결국 이제 막 탄생하려는 주체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해 그 주체의 탄생을 촉진하고 그것을 통해 불가능한 동일시를 완수하는 일이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을 이렇게 이해하기에 김동령과 박경태는 자신들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기록으로서의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전환돼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 작업은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빨리 기록해야 한다는 조급함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거미의 땅>은 경기 북부의 미군이 철수하면서 기지촌 또한 재개발로 사라지고(공간이 변하자 사람들의 특정한 삶의 형태도 사라지며), 그 사라지는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겨 기억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바삐 시작한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작업이 마무리된 지금, 이 성급한 기억하기의 필요성에 대해 묻게 됩니다. 차라리  ‘꽃분이’1)라는 묘비의 가명처럼 영원히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을 어떻게든 흔들어 깨워 다시 기록하는 이 번거로운 일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물론 사회적 소수자들을 정당한 방법으로 기억해야겠지만, 이것이 사회적인 힘을 다투어 해야 하는 기억의 의무가 된다면, 이들은 ‘보이지 않을 권리’ 혹은 ‘망각-되기’의 가능성을 박탈당한 채 대중의 단일한 시선 속에 갇힐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각인되었던 복잡한 결들은 사라지고 ‘달러벌이의 역군’이나 ‘미군의 성착취 피해자’라는 집단적 기억의 소재로만 기억-소비되는 것이죠.”(박경태, 앞의 글)

  예술적 관심은 기억의 단순한 보존에서 다양한 기억의 방법들에 대한 것으로 옮겨가는데, 이때 기억의 방법이란 사실 기억의 문제라기보다는 새로운 주체를 탄생시키는 방법의 문제이다. 예술에 참여하는 사회적 소수자들은 이미 존재하던 대로 기억되기를 원하는 대신 예술적 접속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형성되는 불가능한 동일시를 원한다. 이제 예술의 문제는 보존이 아니라 변신2)이다. 북디자이너 정은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책은 우리가 만나기 위한 핑계일 뿐이다.” 책을 만들고 읽는 일만 그런 게 아니라, 어쩌면 예술 자체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예술을 수단화한다고 화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의 영화를 보고 그 작업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예술이 결코 만날 일 없었던 이들을 서로 만나게 하고 그 만남을 자꾸만 반복하게 하는 아름다운 구실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힘들었다. 물론 그 만남은 확정되어 있지 않고 무수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또 그 무수한 만남 속에서 변신하는 주체의 형상 역시 제한되거나 예견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한한 재현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재현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의 변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런 예술을 우정의 예술, 혹은 니체를 따라 천사들의 황혼이라고 부르고 싶다.

각주

  1. 1) 기지촌 인근 야산을 뒤지다 보면 언제나 무연고 묘지터를 볼 수 있다. 그곳에 가면 산에 굴러다니던 조악한 돌덩어리-묘비를 발견하는데, 그곳에 검은 페인트로 ‘꽃분이’라던가 ‘이쁜이’라는 이름이 새겨져있다. 동네사람들에 의하면 양색시들이 자살하거나 또는 병사한 뒤 이름을 알리기 싫은 동료 양색시들에 의해 ‘꽃분이’, ‘이쁜이’라는 가명으로만 비석을 남기고 남몰래 추모하였다 한다.
  2. 2) metamorphosis 이 변신의 작업은 희망적이지만 쉽지 않은 과정이다. 불가능한 동일시가 일종의 사회적 얼룩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두 감독의 영화에 출연했던 주인공들은 감독들을 찾아와 “요즈음 300만명에 육박하는 ‘초대박 흥행’을 하고 있는 한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면서 본인들도 이제 돈이 되는 작품을 하고 싶다고 하며, … 돈이 되는 작품이란 사람들이 보고 난 뒤 눈물도 흘리고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감독들은 이들에게서 “오히려 무대를 스펙타클하고 화려하게 만들지 않으려 하고, 동정과 연민의 시선에 저항하려는 감독들에 대한 실망감과 원망”을 느낀다.(김동령, 이메일 서신교환) 이처럼 인민은 ‘표현하는 자’라는 새로운 형식을 점유하지만, 이 표현의 내용에서 기존의 주체화 표상을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불가능한 동일시를 완수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감독들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기존의 계몽적 위계를 상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술가와 인민이 각자의 불가능한 동일시의 부단한 시도를 위해 나아갈 수 있을까? 김동령은 “이 문제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의 발목을 붙들게 될, 해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고 조금은 씁쓸한 목소리로 고백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이 고백이 소중한 것은 불가능한 동일시의 과정이 개념적 논의에서 예견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고 불화와 교전의 과정 속에서 이뤄지며 이중적인 양상을 지닌다는 실감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