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반쯤
새벽 2시 반쯤, 밖에 내놓은 쓰레기 봉지가 와르르 쏟아지며 현관문을 따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놀랍게도 마리아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감싸 안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부들부들 떨며 들어왔다.
그녀는 클럽에서 일이 끝난 후, 친구 집에서 미군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 중 한 미군 이 마리아에게 뚱뚱하다며 시비를 걸어왔고 마리아는 욕설로 대꾸했다고 한다. 그러다 미군이 그녀의 가슴을 쳤고 마리아는 그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창문을 깼다. 그러자 미군은 그녀의 몸 뒤에 서 팔을 꺾고는 바닥에 내리쳐 머리와 등을 짓밟았고 한다. 러시아 여성들이 말리자 미군은 마 리아를 현관 밖으로 내동댕이치고는 한국경찰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러시아 여성들은 불법 체류 중이었던 마리아에게 빨리 피하라고 했고, 그녀는 그 길로 황급히 뒷골목을 통해 집으로 돌 아온 것이었다.
당시 나의 카메라는 거실 소파에 있었다. 언제나 촬영대기 상태였던 내 카메라는 마리아의 언저리 를 돌며 1년 넘게 그녀의 시시한 일상만, 그것도 마리아가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허락한 ‘아무것 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만을 줄기차게 촬영하고 있었다. 이 곳 기지촌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서 나는 여기에서의 삶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으며 단지 이곳에서의 여성 들의 삶이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그 자체임을, 아니 단순하고 반복되는 하루하루를 견디 는 것이 여성들의 삶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지금 미군에게 맞고 돌아온 이 순간은 그야말로 가장 ‘따근따근한 사건’이었 고 영화에서 ‘한방’을 건질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늘 자의식이 강해 카메라를 의식하던 마리아는 이 순간만은 자신의 고통 앞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어 내가 카메라를 든다고 해도 완전 히 속수무책으로 찍힐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마리아의 비극적인 상황 앞에서 나 는 속으로 호재를 부르며 이성적으로는 이미 소파에 손을 뻗어 카메라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하게도 나의 몸은 순간적으로 멈칫거렸다.
한 1초 동안 내 머리 속에는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광경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이 순간 마리아의 상황을 함께 겪을 것인가,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찍을 수 있을까, 이것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순간적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치다가 결국 나는 카메라를 가져 오지 못했고 그저 손을 뻗어 수건걸이에 걸린 수건을 빼 마리아의 팔에 박힌 유리조각을 빼고는 상처를 지혈했다. 우리는 혹시 경찰이 올까하여 집의 모든 불을 끄고 함께 침실로 들어갔다. 끅끅 거리며 울음을 참던 마리아는 자신이 한국에 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며 동두천에 갇힌 자신의 삶을 한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그녀는 내게 왜 이 상황을 카메라로 찍지 않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한국에서 겪 은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가장 비참한 모습을 보고 싶으 니 카메라로 자신을 찍어달라고 말했다.
그토록 자존심과 자의식이 강해 내 카메라에 결정적인 통제력을 행사하던 그녀가 울면서 자신을 찍어달라고 오히려 나에게 주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녀에게 ‘괜찮아.. 안 찍어도 괜찮아’라고 말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마리아는 미군부대에 가서 상해 비용을 청구하겠다며 나에게 증거용 사진을 찍어달 라고 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 후에 내게 남은 증거는 이 ‘증거용 사진’ 밖에는 없다. 동두천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온 후, 한 일주일간은 죽고 싶을 정도로 후회와 자학이 몰려와 잠을 자지 못했다. 나는 그저 ‘앞으로 결정적인 순간이 또 나타날테니 기다리자’며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큐멘타리를 찍는 2년여 동안 그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도 않았거니와, 자존심을 회복 한 마리아가 그런 상황에서 촬영을 허락하는 일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